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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헌법의 문제점)

우선, 당시의 제도적 문제가 지적됩니다. 전전(戰前) 일본에는 정치와 군사를 적절히 통합하는 구조가 없었습니다.

대일본제국 헌법 하에서는 군대를 지휘하는 권한인 통수권(統帥権)은 독립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정치와 군사 관계에서 항상 정치, 즉 문민(文民)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문민통제'의 원칙이 제도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내각총리대신의 권한도 제한적이었습니다. 제국 헌법 하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을 포함한 각 국무대신은 대등한 관계로 간주되었으며, 내각총리대신은 수반으로 여겨지면서도 내각을 통솔하기 위한 지휘 명령 권한은 제도적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 무렵까지는 원로들이 외교, 군사, 재정을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무사로서 군사에 종사한 경력을 가진 원로들은 군사를 잘 이해한 위에서 이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말을 빌리자면, "원로, 중신 등 초헌법적 존재의 매개"가 국가 의사 일원화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원로들이 점차 세상을 떠나고 그러한 비공식적 구조가 쇠퇴한 후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 하에서 정당들이 정치와 군사의 통합을 시도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세계에 큰 변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일본은 국제 협조의 주요 담당자 중 하나가 되어 국제연맹에서는 상임이사국이 되었습니다. 1920년대 정부 정책은 시데하라 외교(幣原外交)에 나타났듯이 제국주의적 팽창은 억제되었습니다.

1920년대에는 여론은 군대에 대해 엄격했고, 정당은 대규모 군축을 주장했습니다. 군인들은 위축감을 느꼈으며, 이에 대한 반발이 쇼와 시대 군부 대두의 배경 중 하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종래 통수권은 작전 지휘에 관련된 군령(軍令)에만 한정되었고, 예산이나 체제 정비에 관련된 군정(軍政)에 대해서는 내각의 일원인 국무대신의 보필(輔弼) 사항으로 해석 운용되었습니다. 문민통제 부재라는 제도적 문제를 원로, 다음으로 정당이 이른바 운용을 통해 보완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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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문제)

그러나 점차 통수권의 의미가 확대 해석되어, 통수권의 독립이 군의 정책 전반이나 예산에 대한 정부 및 의회의 관여·통제를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부에 의해 이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정당 내각 시대, 정당들 사이에서 정권 획득을 위해 스캔들 폭로전이 벌어졌고, 정당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1930년에는 야당인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가 입헌민정당 내각을 흔들기 위해 해군 일부와 손을 잡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 비준을 둘러싸고 통수권 침범이라고 주장하며 정부를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정부는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겨우 비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1935년, 헌법학자이자 귀족원 의원인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의 천황기관설(天皇機関説)에 대해 입헌정우회가 정부 공격의 재료로 삼아 이를 비난하고, 군부까지 끌어들이는 정치 문제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내각은 학설상의 문제는 "학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며 이 문제에서 정치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했으나, 최종적으로 군부의 요구에 굴복하여 종래 통설적인 입장이었던 천황기관설을 부정하는 국체명징성명(国体明徴声明)을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하고 미노베의 저작은 발매 금지 처분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정부는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습니다.

(의회의 문제)

본래 군에 대한 통제를 해야 할 의회도 그 기능을 잃어갔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사이토 다카오(斎藤隆夫) 중의원 의원의 제명 문제였습니다. 사이토 의원은 1940년 2월 2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전쟁의 수렁화를 비판하고 전쟁 목적에 대해 정부를 엄격하게 추궁했습니다. 이른바 반군 연설입니다. 육군은 연설이 육군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이에 맹렬히 반발했고, 사이토 의원의 사직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많은 의원들이 동조하여 찬성 296표, 반대 7표의 압도적 다수로 사이토 의원은 제명되었습니다. 이는 의회 내에서 의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려 했던 드문 예였으나, 당시 의사록은 지금도 그 3분의 2가 삭제된 채 남아있습니다.

의회에 의한 군에 대한 통제 기능으로서 극히 중요한 예산 심의에서도 당시 의회는 군에 대한 견제 기능을 전혀 수행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1937년 이후 임시 군사비 특별 회계가 설치되었고, 1942년부터 45년까지는 군사비의 거의 전부가 특별 회계에 계상되었습니다. 그 특별 회계 심의에 있어서 예산서에 내역이 제시되지 않았고, 중의원·귀족원 모두 기본적으로 비밀회(秘密会)로 심의가 진행되었으며, 심의 시간도 극히 짧아 심의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전혀 없었습니다.

전황이 악화되고 재정이 궁핍해지는 중에도 육군과 해군은 조직의 이익과 체면을 걸고 예산 획득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다투었습니다.

더하여, 다이쇼(大正) 후기부터 쇼와(昭和) 초기까지 15년간 현역 총리 3명을 포함한 많은 정치인이 국수주의자나 청년 장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암살된 이들은 모두 국제 협조를 중시하고 정치에 의해 군을 통제하려 했던 정치인들이었습니다.

5.15 사건이나 2.26 사건을 포함한 이러한 사건들이 그 후 의회나 정부 관계자를 포함한 문민들이 군의 정책이나 예산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하고 행동할 환경을 크게 저해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