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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문제)

그러나 점차 통수권의 의미가 확대 해석되어, 통수권의 독립이 군의 정책 전반이나 예산에 대한 정부 및 의회의 관여·통제를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부에 의해 이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정당 내각 시대, 정당들 사이에서 정권 획득을 위해 스캔들 폭로전이 벌어졌고, 정당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1930년에는 야당인 입헌정우회(立憲政友会)가 입헌민정당 내각을 흔들기 위해 해군 일부와 손을 잡고 런던 해군 군축조약 비준을 둘러싸고 통수권 침범이라고 주장하며 정부를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정부는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겨우 비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1935년, 헌법학자이자 귀족원 의원인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의 천황기관설(天皇機関説)에 대해 입헌정우회가 정부 공격의 재료로 삼아 이를 비난하고, 군부까지 끌어들이는 정치 문제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내각은 학설상의 문제는 "학자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며 이 문제에서 정치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했으나, 최종적으로 군부의 요구에 굴복하여 종래 통설적인 입장이었던 천황기관설을 부정하는 국체명징성명(国体明徴声明)을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하고 미노베의 저작은 발매 금지 처분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정부는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갔습니다.

(의회의 문제)

본래 군에 대한 통제를 해야 할 의회도 그 기능을 잃어갔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사이토 다카오(斎藤隆夫) 중의원 의원의 제명 문제였습니다. 사이토 의원은 1940년 2월 2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전쟁의 수렁화를 비판하고 전쟁 목적에 대해 정부를 엄격하게 추궁했습니다. 이른바 반군 연설입니다. 육군은 연설이 육군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이에 맹렬히 반발했고, 사이토 의원의 사직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많은 의원들이 동조하여 찬성 296표, 반대 7표의 압도적 다수로 사이토 의원은 제명되었습니다. 이는 의회 내에서 의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려 했던 드문 예였으나, 당시 의사록은 지금도 그 3분의 2가 삭제된 채 남아있습니다.

의회에 의한 군에 대한 통제 기능으로서 극히 중요한 예산 심의에서도 당시 의회는 군에 대한 견제 기능을 전혀 수행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1937년 이후 임시 군사비 특별 회계가 설치되었고, 1942년부터 45년까지는 군사비의 거의 전부가 특별 회계에 계상되었습니다. 그 특별 회계 심의에 있어서 예산서에 내역이 제시되지 않았고, 중의원·귀족원 모두 기본적으로 비밀회(秘密会)로 심의가 진행되었으며, 심의 시간도 극히 짧아 심의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전혀 없었습니다.

전황이 악화되고 재정이 궁핍해지는 중에도 육군과 해군은 조직의 이익과 체면을 걸고 예산 획득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다투었습니다.

더하여, 다이쇼(大正) 후기부터 쇼와(昭和) 초기까지 15년간 현역 총리 3명을 포함한 많은 정치인이 국수주의자나 청년 장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암살된 이들은 모두 국제 협조를 중시하고 정치에 의해 군을 통제하려 했던 정치인들이었습니다.

5.15 사건이나 2.26 사건을 포함한 이러한 사건들이 그 후 의회나 정부 관계자를 포함한 문민들이 군의 정책이나 예산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하고 행동할 환경을 크게 저해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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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문제)

또 하나,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은 미디어의 문제입니다.

1920년대 미디어는 일본의 대외 팽창에 비판적이었고, 저널리스트 시절의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은 식민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논지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무렵부터 미디어의 논조는 적극적인 전쟁 지지로 바뀌었습니다. 전쟁 보도가 '팔렸기' 때문이며, 각 신문은 발행 부수를 크게 늘렸습니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을 계기로 구미 경제는 크게 타격을 입었고, 국내 경제 보호를 이유로 고관세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일본의 수출은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심각한 불황을 배경 중 하나로 내셔널리즘이 고양되었고, 독일에서는 나치가,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당이 대두했습니다. 주요국 중에서 소련만이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사상계에서도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대는 끝났고, 미영 시대는 끝났다는 논조가 확산되어 전체주의나 국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토양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동군 일부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불과 1년 반 만에 일본 본토의 몇 배에 달하는 땅을 점령했습니다. 신문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많은 국민은 이에 현혹되어 내셔널리즘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일본 외교에 대해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만주사변에서의 군부 움직임을 비판했고, 기요사와 기요시(清沢洌)는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에 의한 국제연맹 탈퇴를 엄격하게 비판하는 등 일부 날카로운 비판도 있었으나, 그 후 1937년 가을 무렵부터 언론 통제 강화로 정책에 대한 비판은 봉쇄되었고,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논조만이 국민에게 전달되게 되었습니다.

(정보 수집·분석의 문제)

당시 정부를 비롯한 우리나라가 국제 정세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과의 사이에 소련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 동맹을 협상하는 가운데,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자 당시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郎) 내각은 "유럽 천지는 복잡 기괴한 신정세를 낳았다"며 총사직합니다. 국제 정세, 군사 정세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는지, 얻은 정보를 올바르게 분석할 수 있었는지, 적절하게 공유할 수 있었는지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